김정은의 광폭 정상외교와 러시아

2018-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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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를 찌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광폭 정상외교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은다. 지난 4월 27일과 5월 26일, 불과 한 달 사이에 문재인 대통령과 두 차례나 판문점에서 맞대면 했다. 비핵화 협상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북경(3.25~28)과 대련(5.7~8)을 전격 방문한 가운데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도 두 차례 회동했다. 6월 12일에는 싱가포르에서 마침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역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김정은의 정상외교에서 김일성, 김정일 선대 지도자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이 발견된다. 해외방문 시 퍼스트레이디 이설주 여사를 대동하고 전용열차가 아닌 전용비행기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칙칙한 은둔자의 모습을 탈각시키고 정상국가로서의 북한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미 관계 개선, 나아가 북미 수교를 위한 강한 의지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에게 러시아의 유용성
북한의 경로 의존적 외교 행태로 보아 조만간 방러 가능성도 높다. 지난 5월 31일 평양을 방문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푸틴 대통령이 작성한 김 위원장 초청 친서를 전달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싱가포르 북미회담 성과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향후 김정은 정권의 대러 접근 수준과 북·러 정상회담 시기를 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고립무원의 북한에게 유리한 이익 균형과 세력 균형의 창출을 위해 러시아를 이용해야 하는 유인(誘因)은 강하다. 우선 북미정상회담 이후 전개될 워싱턴과의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앞두고 전통적 우호세력의 결집과 대미 협상력 제고를 위해 러시아의 위세를 등에 업을 필요가 있다. 북중정상회담에 이은 북러정상회담의 성사는 김정은의 한반도정세 주도권 장악에 기여할 수 있다. 북미회담 실패가 초래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공격을 제어하고 리비아 식 종말을 방지하기 위한 보험도 들어놔야 한다. 대북 영향력 확보를 둘러싼 중러의 경쟁구도를 조성해 그 사이에서 다양한 국익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도 김정은의 방러 촉진 요인이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대북제재로 경제적 고통이 심화돼 가는 상황에서 취약한 고리를 찾아 그 강도를 이완시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북한의 비핵화 조건 및 속도와 관련해 크렘린과 일정수준 협의도 필요할 것이다.

◆러시아의 북한 포용 이유
푸틴도 김정은의 방러를 내심 기다릴 것이다. 미국과 날 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에게 북한은 글로벌 반미연대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의 핵심 성원으로서 지구촌의 전략적 안정화를 위해 미국과 함께 북한의 비핵화를 강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북핵문제의 지속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긴장을 항구화 해 21세기 러시아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시베리아 극동지역 개발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한다. 국제적 고립 해소의 출구를 찾는 김정은을 초청·환대함으로써 러시아 ‘패싱’ 우려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크렘린은 옐친시대 한반도에서 당한 치욕적인 외교 트라우마가 있다. 북한정권의 성립과 발전의 결정적 후원자로서 한반도문제의 핵심 이해당사자로 자부했던 자국이 1997년 성립된 한반도 4자회담에서 배제된 것이다. 러시아의 대국적 자존심에 지대한 손상을 가한 일종의 외교 참사였다. 옐친정부의 대북관계 단절과 친서울 노선이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불식시켰다는 점을 명료히 인식한 크렘린 전략가들이 이런 우(愚)를 다시 범할 리 없다. 북한이 러시아가 강력히 반대하는 핵을 개발하고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푸틴정부가 오히려 북한을 껴안고 유엔 대북제제의 최소한의 이행자로 머물러 있는 중요한 이유다.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위한 합창(合唱)?
향후 북러정상회담이 실현될 경우 유심히 살펴봐야할 점 하나가 있다. 김정은이 대미 협상카드로 한반도 영세중립화 방안을 만지작거리고, 이것을 푸틴과 협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북한 김일성이 1987년 미소정상회담 당시 고르바초프를 통해 ‘한반도 중립국 창설’을 레이건 행정부에게 제안한 30년 전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 4월 7-8일 1995년 유엔에서 영세중립국 지위를 부여받은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는 북한이 의도한 비핵화의 최종 종착역이 연방제 한반도 영세 중립국 안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크렘린은 한반도의 영세중립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러시아는 그 영토의 광활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입과 전쟁을 치렀고, 잦은 국경선의 변화를 경험해왔다. 이런 국경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지정학적 상황이 취약한 변경지대에는 반드시 그 주변에 ‘완충국가의 고리’를 만들어 영토적 안전보장을 도모해 왔다. 과거 동유럽, 핀란드, 몽고 등이 적절한 사례에 해당하고 한반도도 그 중요한 대상이다. 그래서 북한 김정은 정권이 체제보장의 대안으로 구상하는 한반도 영세중립국 안이 러시아에게는 문자 그대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여러 정황상 북한이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연방제 한반도 중립국가 안을 제안할 공산이 크고,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수용될 개연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첫 북미정상회담의 개최에 이어 한반도 영세중립화 논의는 동북아 정세의 새판 짜기를 의미하고 북핵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숨에 절단하는 호기(好機)가 될 수 있다. 너무 앞서가는 기우(杞憂)일지 모르나, 한반도 위기의 가속화에 제동을 거는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와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주도적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에게 새로운 차원의 도전과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