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자와 일하고 싶지 않다”, 펜스룰 논란

2018-04-12

조유진 기자 | 96yujin@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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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각종 분야를 불문하고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폭력 고발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투 운동의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최근 젠더문제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펜스룰’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했다. 펜스룰은 불필요한 성추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개인적인 규칙을 만들어 방지하려는 일종의 사생활 수칙이다. 하지만 펜스룰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펜스룰은 ‘여성과의 만남이나 접촉을 차단해 괜한 오해를 막기 위한 남성의 자기 방어적 행동지침’이라는 의견과 ‘여성에게 새로운 차별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최근 공방의 대상이 된 펜스룰. 해결책일까, 또 다른 사회문제일까.

◆‘펜스룰’의 펜스는 울타리가 아니다

2002년,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 인터뷰에서 마이크 펜스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한 본인의 행동수칙을 밝히면서 “아내가 없을 땐 다른 여성과 단둘이 술이나 밥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시초로 펜스의 이름을 따서 개인의 행동지침을 정해놓는다는 ‘펜스룰’의 개념이 생겼다.
그런데 펜스보다 먼저 이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있다. 바로 복음주의의 대부라고 불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이다. 그는 기혼 기독교인 사이의 불순한 만남을 비판하며 목회활동의 원칙으로 △교회 재정의 투명성△복음 전파를 위한 협력△정직한 홍보△성적 도덕성 확보를 제시한다. 이 중 성적 도덕성 확보는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 둘이 만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다. 즉 그레이엄룰은 성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기 절제와 기독교적 수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유혹 자체를 회피하자는 것이다. 이렇듯 펜스룰의 본질 또한 여성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겠다는 것이 아닌 종교인으로서의 개인 절제였다.
그렇다면 2002년에 제시된 펜스룰이 오늘날 화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3월, 워싱턴 포스트 보도는 펜스의 발언을 인용하며 펜스의 보수적인 결혼관을 전했다. 보도 이후 펜스는 “여성차별주의자”, “남성을 유혹하는 대상으로만 여성을 바라봤다” 등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에 펜스는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말이다”라며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지만, 이미 왜곡된 펜스룰은 미국에서 큰 논란이 됐다.

◆왜곡된 펜스룰의 극단성

우리나라에서도 왜곡된 펜스룰의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2009년 아내와 사별한 뒤 기업 내 보좌관·수행원부터 집안 가사 도우미까지 모두 남성으로 바꿨다. 정 회장의 측근은 “주변에 여성을 두면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조심스레 추측했다. ‘몽구룰’이라고 불리는 이 사례는 왜곡된 펜스룰이 특정성별에 제한된 채용과 해고를 정당화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최근 들어 허위사실신고처럼 미투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펜스룰에 대한 의견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듯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펜스룰 만화’가 등장했다. 이 만화는 연인 사이인 남녀가 신체적 접촉을 하거나 함께 식사를 하기 전, 남자가 “합의서를 작성해야한다”며 “후에 네(여성)가 성폭행 혐의로 날 고소하려할 때 무고함을 밝히려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만화의 내용은 실제 사례로도 나타났다. 2011년, 개그맨 김현철이 20대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가 성폭행 혐의로 피소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갖기 전 상호 합의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의 각서가 공개됐고 김씨는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일부 남성이 여성을 ‘성별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해 극단적으로 접촉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최근에는 회사 내 성폭행 검열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성과의 접촉을 막는 조치를 회사 사규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며 “여성 동료와 출장, 회식, 업무 등을 꺼리는 등 여성과의 교류에 더욱 조심스러운 분위기다”고 전했다. 성희롱을 막기 위해 내놓은 방어기제로서의 펜스룰이 성평등과 반대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차별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펜스룰이 가져오는 새로운 성차별 문제

‘사생활 관리수칙’이었던 펜스룰이 우리나라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미투 운동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성찰해야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펜스룰을 왜곡해 여성을 따돌리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허 조사관의 견해에 따르면 국내 권위 있는 인사들에 대한 고발이 확산됨에 따라 일부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여성과의 교류를 줄이기 시작했고, 만남을 줄이면 성폭력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과 함께 이것이 심지어 미투 운동의 대처법이라는 논리로 확대된 것이다.
극단적인 펜스룰에 대해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펜스룰을 미투 운동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여성을 배제하겠다는 식으로 현재 상황을 잘못 진단한 것”이라며 “결국 여성을 공격하는 또 다른 방식인 셈”이라고 비판했다. 펜스룰이 여성의 채용 및 인사 불이익이나 직장 내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정당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으로 성평등 문제가 주목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난달 KB국민은행이 신입채용에서 성차별 채용 비리로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민은행뿐만 아니라 2016년 기준 은행 신규채용 성비를 살펴보면 대략 7대 3으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전히 존재하는 취업·채용 과정 속 남녀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고용노동부는 “익명 신고센터를 설립해 직장 내 성차별 행위에 대한 신고 활성화를 유도 하겠다”며 “펜스룰이라는 명목 하에 여성을 배제하는 경우는 강력한 엄중조치로 대응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묵과해온 성폭력문제가 미투 운동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권력적 상하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가 계속해서 증명되고 있다. 성별의 문제를 떠나 성폭력을 하나의 고질적인 폭력문제로 인식·비판하는 것을 지향해야하며, 미투 운동과 펜스룰을 양성갈등문제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조유진 기자 96yujin@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