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에게 권하는 빨간 책 - 나를 보내지 마

2015-12-08

이정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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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나를 보내지 마』에는 복제인간들이 거주하는 ‘헤일섬’이라는 구역이 등장한다. ‘헤일섬’은 ‘정상 인간’들의 거주지와 다를 바 없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헤일섬’에서 양 육되는 복제인간들은 17~20세가 되면 정상인간들의 장기 이식을 위해서 하나씩 ‘차출’된다. 뇌사자나 사고자의 기증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장기이식 수요를 메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섬뜩한 설정이지만, 소설 속의 ‘헤일섬’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와 비슷한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복제인간들이 자신 들의 운명을 거부하고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은 정부가 파견한 특수부대와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액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헤일섬’의 복제인간들은 “조금 더 살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지 못하고 기껏
해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보내 달라’는 요구를 할 뿐이다. 가상의 미래를 다뤘지만 이 소설은 현실에 대한 소름끼치는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이 미미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일방적으로 운명을 설계하는 체제에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인간세계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것이 그들의 생, 그 자체다. 한국 사회가 청 춘들에게 강조하는 ‘바람직한 청년상’과 아주 흡사하지 않은가. ‘순종’과 ‘적응’만을 강요하고 ‘규칙’과 ‘질 서’를 위반하면 ‘부적응자’나 ‘패배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인 지금-여기의 현실은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곳은 과연 ‘헤일섬’과 얼마나 다른가. 복제인간들이 순종할수록 장기이식을 주도 하는 대기업과 의료기관이 더욱 부유해진다는 사실은 소설 속의 ‘헤일섬’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높은 기 시감을 선사한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 그 가능성은 상상력으로부터 움튼다.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 는 이유다. 지금-여기가 바로 ‘헤일섬’이다.

이정현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