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2015-12-07

김정록 기자 | 91rock@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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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진규 씨는 우리학교 이란어학과 1992년 졸업생이다. 그녀는 2007년 소설 <달을 먹다>로 데뷔해 2009년 산문집 <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소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2010년 소설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을 발표했다.

늙고 병든 아버지의 책장은 낡은 책들로 가득했다. 텁텁한 질감의, 누렇게 바랜 종이들에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과 해독이 불가능한 문자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세계가 언제나 막연하고 두려우면서도 욕심이 났다. <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김진규

“작가가 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우연이었고, 시간의 힘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미친 듯이 읽었다. 19살부터 20년 가까이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읽다보니 머릿속으로 넣는 것은 많은데 나오는 것이 없었고, 이만큼 읽었는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쓰게 된 것이다. 결과물이 자연스레 나왔고 문학동네 공모에 참가했는데 운 좋게 당선됐다. 나는 원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하다 보니 길이 보이고 방법이 생기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냥 평소에 쓰던 것들이 조금씩 뭉쳐졌다. 조금씩 쓰던 것들이 모여 책이 됐다. 작은 눈덩이가 굴러가 커지듯이.”

“그냥 그렇게 살면 평생 누구 엄마, 누구 마누라로만 살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2010년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이후 작품이 없다. 최근 근황은?
“생계형 글을 쓰고 있다. 여기저기 기획사나 신문사 등…. 다음 작품 구상은 하고 있는데 밀고나갈 상황이 못 된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생계형 글을 쓰고 있다는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사람이 생계에 메이면 뒤로 밀려가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제쳐두면 삶에 낙이 없고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다, 그러니까 생계를 위한 일이어도 관심 있는 분야의 일을 했으면 좋겠다’ 항상 딸에게 하는 말이다. 소설을 못 써도 글을 쓰고 있으니 하나의 연습이라 생각하고 내가 하는 것처럼. 만약 내가 글이 아니라 어디 사무직을 한다면 정말 불행할 것 같다.”
-그녀는 졸업 직후 결혼을 해 가정주부가 됐다. 당시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이 쓸모 없어지는 것 같아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서 배운 모든 지식은 고된 ‘집안일’과 마주쳤을 때 그녀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집안일이나 육아라는게 정말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해도 티가 잘 안난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게다가 매일 매일 반복된다.‘내가 이려려고 공부했나?’하는 생각 많이 했다. 나는 오히려 학생때보다 집안일을 하면서 근원적인 물음을 많이 가졌다.‘나는 무엇이며 왜 태어났고 왜 사는가’같은 것들. 현실이 너무 싫어서 책을 읽었다. 적어도 책을 읽을 때만큼은 현실의 ‘나’를 잊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잖나. 현실의 모든 것을 잊고 책 속으로 도피한 것이다.”
-그녀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책인 <달을 먹다>는 조선시대 중상류층 사람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이야기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어두운 면을 가진다. 즉 <달을 먹다>엔 완벽한 사람이나 행복한 결말을 맞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우울증으로 힘들어 할 때, “당신에겐 출력이 필요해, 입력된 만큼. 그러지 않음 미칠 거야!”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의 말처럼 미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우울증을 작중 인물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 것이 아닐까?
“어떤 소설가들은 인물을 만들어두고 그들이 살아가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설을 쓴다는데, 나는 그게 안 된다. 그런 작가들은 정말 고수인 거다. 나는 내 인물에 온전히 빙의해야만 글을 쓸 수가 있다. 사실 내 첫 번째 책인 <달을 먹다>와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은 동시에 구상했던 작품인데, 전자는 정말 끝없이 우울하고 무거운 반면에 후자는 경쾌한 마당놀이 같은 작품이다. 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 빙의해야만 이야기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달을 먹다>를 마무리 짓고 다음 작품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2007년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아 데뷔했다. 그녀에겐 가정주부인 것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었다. 수상하기 전에 시나 단편소설을 써본 적이 없고, 처음 쓴 장편소설로 덜컥 상을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솜씨는 타고난 것일까?
“아니다. 그냥 그나마 편하게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무슨 말이냐면 학창시절에 글쓰는 숙제를 내주면 어렵지 않게 해내는 정도? 빛나는 재능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느껴지는 재능 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음악 좋아한다고 모두 음악가되는 것 아니듯이. 그냥 책을 좋아하기만 했다. 시나 소설을 딱히 써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있었다. 주변 환경을 볼 때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그것을 구성해보는 그런 습관. 여기서 단어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버스에서 보이는 의자나 바깥 풍경을 머릿속에서 문장으로 만들어보고 그랬다. 이 습관 덕에 어딜 돌아다녀도 심심할 때가 없었다. 지금도 소설을 쓸 때 머리 속에서 그림을 그린 후에 보이는 그림을 글로 표현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한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일반적인 사람들 가운데선 글을 쓰는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들 사이에서 ‘재능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은 없는 것 같다. 원체 너무 잘 쓴 글들이 많으니 그들과 비교하면 내 글이 그 수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만한 저자의 글은 정말 멋진 글일 때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 의식을 가지면 글이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다른 작가들도 같은 생각으로 자신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 거다.
-그럼 진짜 잘 쓴 글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주제 사라마구의 <돌뗏목>에서 대륙이동설을 말하는 부분. 발상, 표현력, 공부 삼박자가 완벽한 멋진 문장이다. 이런 글을 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느낀다. 나는 저 세가지 중 공부에 관해선 최고인데….
-그녀의 말대로 전작 <달을 먹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을 보면 소설을 쓰기위해 많이 공부한 티가 난다. 조선시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서술이 대단하다.
“우선 자료는 정말 많다. 국회도서관에 가면 논문도 볼 수 있고 검색도 되고. 공부는 문제가 된 적이 없다. 어느 부분에 대해 써야하면 그 분야에 대한 공부는 전혀 힘들지 않다. 억지로는 못해도 재미가 있으면 다 찾아지고 쓸 수 있다. 내 이야기의 팔 할은 공부에 의지한다. 공부가 지겨워지는 순간 이야기는 없다. 재능 없는 자의 비극이다.”
-그녀의 책 <달을 먹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은 모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녀는 소통의 부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옛 시절을 빌려왔다고 한다. 그녀에게 현대 시대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을까?
“내가 현재 시대를 바라볼 안목이 부족하다. 내가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판단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대 이야기를 말하려면 기준과 의식이 어느 정도 잡혀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나는 자료나 누군가의 판단에 도움 받지 않는 것에 자신이 없다. 늘 판단하려면 자료와 의견을 다양하게 들어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과거는 자료가 많으니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얍삽한 것 일수도. 재능보다는 노력의 결과물로 쓰니... 그리고 나는 현대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내 이야기의 팔 할은 공부에 의지한다. 공부가 지겨워지는 순간 이야기는 없다. 재능 없는 자의 비극이다.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 김진규

-2010년 독자의 만남에서 아직도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에 정서불안(역할갈등)이 있다고 했다. 아직도 소설가라는 이름이 불안한가?
“내가 소설가라는 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려면 작품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세 작품 이후 책이 없으니 그때보다 자신감이 더 떨어졌다. 지금도 ‘내가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책 <모든 문장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에서 ‘소설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으로 그녀는 ‘아니, 나는 소설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 썼다. 소설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소설이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인가?
“책이 사람에게 영향은 줄 수 있지만 달라지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이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은 즐기는 것이다. 정서를 위한 도구지 혁명을 논하기엔 문학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다. 물론 누군가의 글은 주먹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한풀이가 될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작가마다 다르기도 하고 독자마다 다르기도 하다.”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표면장력의 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방울만 더 얹으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내 안에서 느꼈다.<달을 먹다>, 김진규

문학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문학에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나는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녀의 삶을 또 한 번 크게 바꾼 것도 책이고 문학이지 않았나.

김정록 기자 91rock@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