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읽다] 글로벌 복지국가와 한국

2015-06-10

박윤진 | 90yoon@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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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 평범한 질문은 의외로 평범하지 않은 답들과 연결돼 있다. 선진국가의 국민들은 상당수 “그렇다”고 반응하는 반면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들이 후진국으로 인식하는 나라의 국민들에게서 더 많은 비중의 “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대답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한국인들은 ‘헛똑똑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한국은 평균 아이큐가 세계 순위권이고 교육열과 교육시스템 면에서 모든 나라의 귀감이 되고 있는 인텔리 국가다. 하지만 국민들의 자살률은 비정상적으로 높고 출산율은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비현실적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아야만 사회에 진출하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많은 학생들의 진로를 상담하며 이 같은 아이러니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진로를 고민하는 다수는 본인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존재감을 느끼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비합리적인 사회현실을 핑계로 애써 스스로를 부인하고 있었다. 또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 소수들도 역시 ‘헛똑똑 증후군’에 시달리는 기성세대에 길들여져 자신만의 색깔과 생기발랄함을 잃은 듯했다.

선진국의 기준은 무엇인가? 돈 많고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도, 다른 나라를 제압하고도 남을 군사력과 덩치를 자랑하는 국가들도 선진국이라 불리지는 않는다. 학술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은 비교 불가한 사회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 기준은 경제발전이나 국가통제의 효율성에 있지 않고 구성원들의 행복과 안녕에 맞춰져 있기에 ‘선진복지국가’란 단어를 쓴다. 지면의 한계상 나름대로 스타일리시한 사회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평가되는 선진복지국가로 ‘독일, 스웨덴, 미국, 영국’의 예만 들어보고자 한다.

독일은 근대국가의 수립과정에서 형성된 각종 조합들이 연합해 사회적 합의의 구심체가 됐기 때문에 복지서비스 역시 이들이 결성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제공되고 있다.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통한 국가 번영을 위해 경제는 규제되는 동시에 공정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비스마르크 스타일’도 이런 사회문화적 가치의 맥락에서 형성된 시스템의 형태다. 이 같은 특성을 지닌 복지국가군을 ‘조합주의 유형’으로 부르는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이에 해당한다.

스웨덴은 20세기 초반 ‘국가는 국민의 집’이 돼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복지서비스를 보편적 권리로 인식하는 고유 가치를 시스템화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형 선진국가의 대표 주자가 됐다. 이는 국민 모두가 생애 주기 중 사고나 질병 등으로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어 국가가 좋은 집과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가의 복지기능을 강화해 온 결과다. ‘노르웨이’,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 국가군이 이 유형에 속한다. 미국은 보통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로 바라보는데 이 같은 시각은 복지이론적 측면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20세기 중반 슈퍼파워 국가로 부상하면서 그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의료와 보육’을 빈부와 인종차별 없이 제공하는 ‘위대한 사회’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표적 정책으로 ‘부양아동가족부조(AFDC)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의 미래인 모든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비전을 실현시켰다. 우리학교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AFDC 프로그램의 최대 수혜자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연 가난한 흑인 소년이었던 오바마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작은 나라의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금액을 스스럼없이 복지기금으로 내놓는 빌게이츠나 워렌버핏 같은 기업가들이 즐비한 곳이 미국이다. 기부문화가 발달해 각종 복지재단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과 함께 자유주의형 선진복지국가로 평가받는 영국은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간된 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한 복지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재정적자를 이기지 못해 1979년 마거릿 대처 수상이 진두지휘한 신자유주의화 물결에 휩쓸렸다. 하지만 지나친 민영화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자 1998년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 주창한 인적자원에의 투자를 골자로 한 생산적 복지가 받아들여졌고 다시 한 번 사회서비스 시스템의 체질개선에 성공했다. 사회적 기업이 가장 활성화된 국가로 롤모델이 되기까지 이토록 치열한 공방과 노력이 따랐다는 점과 끝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간략하게 살펴 본 선진복지국가들의 특징들을 다시 요약하면 ‘가치의 시스템화’로 정리할 수 있다. 독일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 합의적 전통과 가치를 ‘조합주의 복지시스템’으로, 스웨덴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무한책임을 ‘사회민주주의 복지시스템’으로 엮어냈다. 또한 미국은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율적이면서 진취적인 가치를 ‘자유주의 복지시스템’으로,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내려오는 합리주의를 ‘생산적 복지시스템’으로 빚어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역사적 전통, 사회문화, 국민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의 시스템을 무단으로 도용했고 그 결과는 ‘자살대국’이란 오명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산업화 시대에 경제 규제가 용이한 독일의 ‘조합주의 시스템’을 들고 오면서 그 전제가 돼야 할 조합의 자율적 사회합의와 경제성과의 공정한 분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민주화 시대에는 영국의 ‘생산주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그 철학적 기반인 인간에 대한 투자는 외면한 채 노동의 가치에 비례한 제한적 시혜만 강조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여전히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며 미국의 ‘자유주의 시스템’을 표방해 모든 세대를 무한경쟁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결과는 미국 다음으로 빈부격차가 큰 나라가 되고 말았다. 자유주의 복지국가의 전제 조건인 기업의 자발적 기부문화를 간과한 죄 값은 생각보다 크고도 혹독하다.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는 자부심은 ‘선진복지화’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의 좋은 머리와 부지런함은 모방과 답습에 의한 성공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통찰력과 이를 바탕으로 최적의 시스템을 빚어낼 창조성이 필요한 미래 세대에게 이러한 자부심은 ‘헛똑똑 증후군’에 걸릴 최고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우리학교의 학생들에게서 ‘비스마르크와 베버리지’를 넘어설 그 무언가를 창출해 낼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길이기에 두렵고 외롭겠지만 현실의 모순과 대면할 용기를 갖고 그 길을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