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

2020-04-25

이준성 기자 |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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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과 학생이었다. 과학동아리 회장이었고 고등학교 생활 내내 주기율표와 씨름했다. 나 자신이 수학 공부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티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속한 세계가 날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학자인 우리 아빠는 아들과 함께 연구하는 모습을 로망으로 간직하고 계셨다. 매일 정교하고 객관적인 수치들을 만지다가 퇴근하는 아빠에게 철학이나 문학은 힘없는 탁상공론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실체 없는 무언가를 좇다가 고꾸라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을 걱정했다. 17살의 내가 뚫어내기엔 너무도 두텁고 올곧은 벽을 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조금씩 비껴가는 것이 숨통을 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공대에서 가장 감성적인 요소가 많은 환경공학과를 지망했고 스펙을 쌓는단 명분으로 토론부 활동에 매진했다. 각종 과학 소논문 대회와 동아리 발표 대회에 출전하는 족족 상을 탔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실험내용이 있더라도 말과 글로 때우는 법을 익혔다. 심사위원들은 발표를 유려하게 하는 참가자를 더 좋아했다. 딱 그 정도의 ‘척’이 내가 참전한 학종 전쟁의 깊이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학, 과학공부는 더 어려워졌다. 관심도 없는 내용이 머리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내가 원치 않는 미래가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낄 때마다, 서서히 좁아지는 정사각형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건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쌓아둔 비밀의 부피만큼이나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기까진 긴 시간이 걸렸다. 언론과 정치집단도 늘 그래왔듯 거짓말과 ‘아무 말’을 동원해 자신의 진영을 열렬히 옹호했다. 조선일보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내기 시작한 뒤에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기 때문에 사건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인물과의 유착으로 탄핵당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비현실적인 당시 상황에 무뎌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국정 파탄 사건의 주역은 대기업 회장도, 국회의원도 아닌 소수의 내부자만 알고 있던 중년의 여성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집권한 4년간, 진실은커녕 그 실마리조차도 나의 세계 안엔 없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의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교실엔 흥분이 맴돌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공포였다. 나와 진실 사이의 거리를 알게 됐고, 이번엔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부터 나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어떻게 실체적 진실에 가까워질 것인가에 관한 생각이었다.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하는 것이 더는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갇혀있던 세계를 우습게 뭉개버릴 더 큰 세계가 나타난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재수를 결정하게 됐을 때 나는 문과로 전향했다. 부모님은 나의 의견을 존중하겠단 결론을 내렸지만 단호한 나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경공학과에 진학해 수학과 물리에 압사당할 뻔한 내가 참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느껴진다. 아직도 내가 진실로부터 멀리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감을 간직하고 있다. 재수 생활과 대학 새내기 생활을 지내면서 현상을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수업들은 늘 즐겁다. 보다 능동적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 모색할 수 있게 됐다. 대학 친구는 내 이런 얘기를 평탄한 인생의 귀여운 투정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어떤 래퍼의 말대로 각자의 인생엔 나름의 고충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박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2017년 봄에, 비로소 나는 내 인생의 복판으로 걸어들어왔다.